국내 팬들에게 가장 익숙한 팀인 LA 다저스에는 전설의 투수가 존재한다. 마치 한국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의 영원한 전설 故 최동원처럼 LA 다저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투수. 오래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그 임팩트 하나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신화적 투수. 메이저리그를 쥐락 펴락한 불멸의 커브볼러. 불꽃을 던진 사나이. LA 다저스 영구 결번 32번. 신의 왼팔. 샌디 쿠팩스(Sandy Koufax).



샌디 쿠팩스는 1960년대를 호령한 LA 다저스 최고의 좌완 투수라고 불리며, '지구 최강의 투수' 커쇼마저도 존경해 마지않고, 그 자신을 쿠팩스와 비교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는 정말 전설 중의 전설이다. 하지만 이런 명성과는 맞지 않게 그의 야구 생활은 12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통산 승수는 그 명성에 비해 165승에 불과하기때문에 300승을 가볍게 넘기거나 그에 걸맞는 성적을 거두는 다른 전설들에 비해 전설이라고 불리기에는 기록에서 조금 모자람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를 전설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의 야구 인생을 살펴보자.





어린 시절 농구에도 재능을 보인 샌디 쿠팩스는 농구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출 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한 소년이였다. 농구만큼이나 야구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이 당시 그에게 가장 두드러진 재능은 불꽃같은 패스트볼에 있었다. 이를 살려 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전신인 뉴욕 자이언츠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트라이아웃에 참여했으나 아쉽게도 두 팀은 샌디 쿠팩스를 데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트라이아웃을 통해 이름을 알린 그에게 현 LA 다저스의 전신이였던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터가 트라이아웃을 제안했고, 그 트라이아웃이 샌디 쿠팩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당시 샌디 쿠팩스의 트라이아웃을 지켜본 다저스의 스카우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평생 팔에 소름이 돋은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보았을 때고, 한번은 샌디 쿠팩스의 투구를 지켜보았을 때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피칭을 선보인 샌디 쿠팩스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트라이아웃을 통해 브루클린 다저스와 연봉 6천달러, 계약금 1만 4천달러라는 거액에 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샌디 쿠팩스의 장점은 불꽃 같은 패스트볼이였지만, 제구에 있어서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그 결과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3년동안 고작 9승 평균자책점 4.00에 그치는 등 전설이라고 불리울 만한 활약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브루클린 다저스가 LA로 연고지로 이전한 이후 LA 다저스로 바뀌게 된 이후 맞이한 첫 시즌인 1958년 그는 처음으로 11승을 달성하며 데뷔 첫 10승 시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9년 한 경기 18 탈삼진을 올리며 메이저리그 한경기 최다 탈삼진 타이 기록, 내셔널리그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잦은 부상과 부진 덕분에 감독의 신뢰를 점점 잃어갔다. 그 때문에 출장 기회 역시 점점 줄어들었고, 샌디 쿠팩스는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퇴를 결심한 샌디 쿠팩스는 딱 1년만 더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자는 심정으로 1961시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이 결정이 샌디 쿠팩스 황금의 6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후에 그가 회상하기로는 야구를 하면서 가장 열심히 했을 때가 1961시즌을 준비하던 때라고 할 정도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훈련에 매진한 쿠팩스는 시즌이 시작하고 완전 수준이 다른 투수로 환골탈태했다. 말그대로 이후 6년간은 쿠팩스로 시작해서 쿠팩스로 끝난 쿠팩스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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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성기 첫 시즌인 1961년 당시 내셔널리그 단일 시즌 탈삼진 기록을 269개로 경신하며, 18승 13패 평균자책점 3.52라는 성적을 거두며, LA 다저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첫 올스타전까지 선정되며 그의 야구 인생 처음으로 최고의 한 해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역대급 활약의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주특기는 제구가 되기 시작한 100마일에 육박하는 패스트볼3층에서 지하로 공을 던지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엄청난 낙차의 폭포수 커브였다. 그의 커브는 커쇼가 나타나기 전까지 커브 구종 가치 1위를 기록하는 등 가히 최강의 마구 중 하나였다.





이듬해에 LA 다저스는 홈구장을 투수 친화구장인 다저스타디움으로 옮기면서 샌디 쿠팩스의 성적 역시 업그레이드 되었다. 승수는 예년보다 낮아진 14승에 그쳤지만 처음으로 2점대 평균자책점을 마크하면서 생애 첫 평균 자책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그 다음해인 1963년이였다. 무려 311이닝을 던지면서 25승 5패, 평균 자책점 1.88 306 탈삼진을 기록하며, 그의 생애 첫 20승과 300탈삼진은 물론이거니와 트리플 크라운에 올라 생애 첫 사이영상을 투표 만장일치로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올스타, 시즌 MVP까지 거머쥐게 되니 그의 인생 최고의 시즌 중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시즌 역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4승 무패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월드시리즈 MVP까지 받게 되니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기록이였다. 트리플 크라운, 시즌 MVP, 노히트노런, 사이영상, 월드시리즈 MVP까지.... 과연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누가 이 기록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이 때 샌디 쿠팩스의 활약에 그를 상대했던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명언 제조기' 요기 베라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그가 어떻게 25승을 했는 지는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5패를 했는 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역대급 커리어를 찍은 이듬해에도 쿠팩스는 여전한 활약을 보여주며, 19승 5패 평균 자책점 1.88 223 탈삼진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여전히 쿠팩스 시대는 현재 진행 중이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1964년에도 역시나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3년 연속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우는 등 또다시 대기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보였던 샌디 쿠팩스는 1965년 또다시 한 단계 진화한다.



그의 커리어 최고 이닝 기록인 335.2이닝을 던지며 26승 8패 평균 자책점 2.04 382 탈삼진을 기록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게 되었고, 생애 두번째 사이영상을 받게 되었다. 382탈삼진 기록은 역대 9위에 해당하고, 이는 탈삼진의 달인 랜디 존슨(Randy Johnson)조차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도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간 끝에 개인 3번째 우승 반지를 끼게 되었고, 커리어 두번째 월드시리즈 MVP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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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5년 샌디 쿠팩스의 가장 큰 업적은 1965년 9월 9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기록한 '퍼펙트 게임'이였다. 게다가 당시 시카고 컵스는 3명의 명예의 전당 예비 후보인 우익수 빌리 윌리엄스, 3루수 론 산토, 1루수 어니 뱅크스가 포진해있는 핵타선이였고, 이들을 상대로 얻어낸 퍼펙트 게임이라 그 기록은 더욱 빛이 났다. 여기에 덧붙여 메이저리그 유일의 4년 연속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으니 이 정도면 그가 얼마나 미친 활약을 한 투수인지 감이 오는가?





그 다음해인 1966년에도 1965년과 마찬가지로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인 27승과 개인 한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인 1.73을 기록했으며 탈삼진을 317개를 잡아내 2시즌 연속 300 탈삼진 기록을 일궈내는 등 미친 활약을 보여줬다. 그 덕에 이 해 역시 트리플 크라운, 사이영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이 해를 끝으로 더이상 샌디 쿠팩스가 공을 던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불과 30살의 나이에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 토미존 수술이 개발되지 않았을 시절였기 때문에 팔꿈치 부상을 당한 투수는 은퇴하는 것이 그 당시 야구계의 순리였다. 현대 야구에 들어서 투수의 가장 전성기로 평가되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중 반을 뛰지 못한 샌디 쿠팩스. 아니면 40살을 더 넘어서 놀란 라이언(Nolan Ryan)이나 랜디 존슨처럼 오래 던졌더라면 지금의 쿠팩스의 기록은 어쩌면 놀란 라이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총 165승 중 무려 129승을 황금의 6년간 올렸다. 만약 그 당시 토미존 수술이 있었다면 쿠팩스는 충분히 300승을 넘기지 않았을까?





그 이후 1972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 그 당시의 득표율은 88.87%이다. 그냥 통산 성적으로 보았을 때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 모자란 성적이지만, 그의 황금의 6년 기록만을 보자면 129승 47패 평균자책점 2.19 1713탈삼진을 올렸기 때문에 무난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더욱 대단했던 것은 현대 야구처럼 4,5일에 한 번 선발 로테이션에 오르는 것이 아닌, 3일에 한 번씩 선발 등판하고도 이런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다. 거기에 낮은 사사구 비율까지 덧붙이니 거르기도 어렵고 치기도 어려운 난공불락의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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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그가 달성한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올스타 6회 : 1961 ~ 1966 (6년 연속)

사이영상 3회 : 1963, 1965 ~ 1966 (2년 연속) (3회 모두 만장일치)

시즌 MVP 1회 : 1963

트리플 크라운 3회 : 1963, 1965 ~ 1966 (2년 연속)

다승 1위 3회 : 1963, 1965 ~ 1966 (2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5회 : 1962 ~ 1966 (5년 연속)

탈삼진 1위 4회 : 1961, 1963, 1965 ~ 1966 (2년 연속)

단일 시즌 최다 382 탈삼진 : 1965 (역대 9위)

통산 최고 K/9 9.27 : 통산 11위 

FIP 1위 6회 : 1961 ~ 1966 (6년 연속)

최다 이닝 1위 2회 : 1965 ~ 1966 (2년 연속)

시즌 최다 완투 2회 : 1965 ~ 1966 (2년 연속)

시즌 최다 완봉 3회 : 1963 ~ 1964 (2년 연속), 1966

단일 시즌 최다 완봉 11회 : 1963 (역대 8위)

노히트노런 4회 : 1962 ~ 1965 (4년 연속, 메이저리그 유일)

퍼펙트게임 1회 : 1965

월드시리즈 MVP 2회 : 1963, 1965

사상 첫 올스타, 트리플 크라운, 사이영상, 시즌 MVP, 월드시리즈 MVP, 노히트노런 동시 달성 : 1963





6년의 짧은 전성기를 보냈지만, 그가 보여준 임팩트는 역대 최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과연 이 정도로 무수한 기록을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낼 수 있는 선수가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한 점으로 미뤄봤을 때 샌디 쿠팩스는 어쩌면 진짜로 신이 보낸 투수일 수 있다. 그는 LA 다저스의 자존심이자, 메이저리그 전체의 전설이다. 모두, 샌디 쿠팩스를 찬양하라! 





자료, 사진 출처 : 베이스볼 레퍼런스 (Baseball Reference), MLB.com

이 카테고리의 첫 레전드로 랜디 존슨(Randy Johnson)을 다뤘다면, 첫 타자 레전드로는 꼭 이 선수를 다루고 싶었다. 스테로이드 시대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이 시대의 마지막 청정타자, 가장 아름다운 스윙을 가지고 있는 타자, 그 존재만으로도 메이저리그를 들뜨게 만들었던 메이저리그 타자, 2016년을 시작하면서 열렸던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9.3%라는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 1차 시기만에 별 중의 별로 빛났던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인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제외하고 시애틀 매리너스의 첫 영구 결번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아로새겨진 그 이름. The Kid. The Natural켄 그리피 주니어(Ken Griffey Jr.).





흔히들 켄 그리피 주니어를 생각할 때, 뛰어난 장타력과 타격 실력을 먼저 생각하는 데, 타격 실력만큼이나 뛰어났던 것이 바로 수비 실력이다. 데뷔 2년차인 1990년부터 1999년까지 10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던 켄 그리피 주니어는 그야말로 5툴 플레이어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 중 하나다. 그는 1987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1라운드 1차 지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였는데, 1990년 아버지인 켄 그리피 시니어와 같은 팀에서 경기를 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부자 백투백 홈런이라는 아주 진기한 기록까지 갖고 있으니, 이 기록은 다시는 나오기 힘든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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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첫 시즌부터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보이며, 타율 0.264 16홈런 61타점을 올리며 그 해의 루키 3위에 선정이 된다. 그의 잠재력은 이듬해부터 폭발하기 시작하는 데,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 연속 3할을 마크하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로 세간의 이목을 받게 된다. 거기에 꾸준히 보완되고 있던 장타력은 1993년 45홈런을 기록하면서 폭발하게 되는데, 부상으로 신음하던 1995년을 제외하고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던 남은 기간동안 꾸준히 40홈런 이상을 쳐내며 팀의 간판 선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몸을 사리지 않은 뛰어난 수비력에 있었다.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중견수에 위치한 그는 언제나 몸을 던지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었고, 특히나 '펜스 워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펜스 플레이에 능해, 항상 부상의 위험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켄 그리피 주니어에게는 자신의 몸보다는 언제나 팀이 먼저였다. 그로 인해 1995년 펜스플레이를 하던 도중 손목이 꺾이는 부상을 당하게 된다. 만약 그가 자신의 몸을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은 그의 몫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가 몸을 사리는 수비를 했더라면 어쩌면 이렇게까지 존경받는 타자가 되지는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 해의 부상을 털고 일어선 켄 그리피 주니어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부상 복귀 이듬해인 1996년 49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한데 이어 1997년 56홈런을 때리는 등 커리어하이를 기록함과 동시에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MVP를 거머쥐게 된다. 리그 MVP를 달성한 이후에도 그의 홈런 생산은 그칠 줄 몰랐고, 1999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아메리칸 리그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앞서 말했듯이 시애틀에 있는 동안 10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함과 동시에 7번의 실버슬러거를 차지하는 등 1990년대 메이저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인기는 NBA의 마이클 조던과 비교될 정도였으니 이만하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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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시즌이 끝난 이후 켄 그리피 주니어는 아버지가 뛰었던 팀인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된다. 신시내티에서는 24번이 토니 페레즈의 영구 결번으로 헌액되어 아버지의 등번호인 30번을 물려받아 쓰게 된다. 허나 이적 첫 해에도 40홈런을 때려내며 등번호가 바뀌었다고 그의 실력까지 바뀌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낸 켄 그리피 주니어. 2000년에는 통산 400홈런을 때려내는 등 내셔널리그도 그의 발 아래서 놀아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는 또 다른 부상을 야기했다. 특히나 2001년부터 시작된 부상의 악령은 2004년까지 계속 되며 그의 통산 커리어 기록을 쭉쭉 깎아먹었다. 항간에는 노쇠화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늘상 기념품 판매 1위를 차지하던 그의 유니폼이 더이상 팔리지 않게 된 것만 봐도 그 때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꺾였는 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잔 부상에도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고, 2005년 다시 35홈런의 고지를 밟으면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 활약은 2007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 해에는 30홈런을 때려내며 그의 커리어 마지막 올스타전에 진출한다. 그러나 그 이후 노쇠화가 점차 가속화되어 결국에는 2008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41경기만을 뛴 채 켄 그리피 주니어는 자신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2009년 친정팀인 시애틀 매리너스로 돌아오게 되고, 2010년 6월 3일부로 전격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은퇴 이후 2013년 시애틀 매리너스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2016년에는 리그 명예의 전당에 그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모자를 쓰고 들어감으로써, 시애틀 매리너스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되는 영광과 동시에 시애틀은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다. 그의 업적을 기릴 때 또하나 주목 받는 사항이 있는 데, 바로 그의 인성과 성품이였다. 성실하고 밝은 성격으로 항상 클럽하우스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초하며, 팀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훌륭하게 중재를 하는 피스 메이커의 역할도 겸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를 찾는 구단이 있었던 것은 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런 성품 덕분이 눈에 보이지 않게 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였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그의 메이저리그 인생을 이렇게 짧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그의 주요 기록을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골든 글러브 10회 : 1990 ~ 1999 (10년 연속)

실버 슬러거 7회 : 1991, 1993 ~ 1994 (2년 연속), 1996 ~ 1999 (4년 연속)

올스타 선정 13회 : 1990 ~ 2000 (11년 연속), 2004, 2007

아메리칸 리그 MVP 1회 : 1997

홈런왕 4회 : 1994, 1997 ~ 1999 (3년 연속)

득점왕 1회 : 1997

타점왕 1회 : 1997

장타율 6할 이상 5회 : 1993 ~ 1994 (2년 연속), 1996 ~ 1998 (3년 연속)

20 - 20 클럽 가입 2회  : 1998 ~ 1999 (2년 연속)

통산 630 홈런 (역대 6위, 약물 타자 제외 역대 4위)

단일 시즌 56 홈런 (역대 16위, 약물 타자 제외 역대 7위) 


(그 외의 기록은 댓글로 제보해주세요.)





그의 위대한 업적과 비교해보았을 때 많은 기록을 세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시대에 배리 본즈(Barry Bonds)라는 약쟁이 타자가 왠만한 기록들을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셔널리그에 배리 본즈가 있었다면 아메리칸리그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약물 검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배리 본즈 역시 약물의 힘으로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 기록을 더럽혔다. 하지만 켄 그리피 주니어는 약물 검사 결과 음성이 나왔고, 약물에 손을 댄 여타 유명 선수들과 그 길을 완전히 달리했다. 그가 활약하던 1990년대가 약물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만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그의 기록이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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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며 깨끗하고 정정당당하게 야구를 하고자 했던 켄 그리피 주니어. 이러한 점이 그를 명예의 전당 최고 득표율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고, 지금도 수많은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야구팬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가 아닐까?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여전히 약물이 판을 치는 프로스포츠에서 그의 업적은 다른 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 마음 속에 영원한 청정타자, Mr. Clean일 것이니 말이다.






P.S 중간중간에 보시는 분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지속적으로 수정할 예정입니다. 계속 재미있게 봐주세요.


자료 출처 : MLB.com, 베이스볼 레퍼런스 (Baseball Reference)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Gettyimages), MLB.com, ESPN




MLB 역사상 최고의 좌완이라 불리며 은퇴하고 여태까지 팬들의 이름에 자주 오르내리는 그 이름. MLB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지나가며 한번쯤은 들어본 그 이름. MLB 레전드의 첫 번째 레전드는 바로 MLB 역사상 최고의 좌완이라 불리는 '빅유닛' 랜디 존슨(Randy Johnson)이다. 한국 팬들에게는 '랜디옹'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불리는 탈삼진 폭격기 랜디 존슨. 랜디 존슨은 내가 이 MLB 레전드라는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가장 먼저 다루고 싶었던 인물이다. 왜냐하면 내가 투수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경향도 있거니와 특히 탈삼진을 많이 잡는 투수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꽃이 홈런이라면 투수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삼진일 것이다. 그렇기에 최고의 임팩트를 선보이며 탈삼진 폭격기로 유명했던 그의 퍼포먼스는 그의 은퇴 이후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 그럼 우리의 랜디옹. 랜디 존슨을 한번 알아보자.





랜디 존슨의 이력을 정리할 때, 그의 나이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는 데, 그의 활약은 보통 선수들의 전성기인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아닌 40대에 가까워서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주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을 던지는 전형적인 투피치 투수였는데, 쓰리쿼터폼에서 나오는 시속 100마일(160km)을 넘나드는 광속구예리하게 떨어지는 명품 슬라이더만으로도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198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지명을 받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게 된 그는 1988년까지 마이너리그에 기량을 쌓다가 1988년 9월 15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갖게 된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4살(한국 나이 26살)이였다. 



이윽고 데뷔 다음 시즌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가 되었다. 그 이후 30대가 될 때까지 3점대 중후반의 평균자책점과 평균 13승의 승수를 따내면서 안정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사실 20대 때의 랜디 존슨은 MLB에서 크게 주목 받는 선수는 아니였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이닝을 잘 먹어주는 (이닝은 200이닝 이상 꾸준히 먹어주었다.) 무난저난한 3~4선발급 정도라고 보면 된다. 보통 20대에 기량이 만개하는 야구선수들의 특성상 평범하디 평범했던 랜디 존슨은 그냥 모든 사람들이 그저 MLB에서 뛰었던 투수 중 한 명쯤으로 남을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선수들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 지를 측정하는 WAA(Wins Above Avg.)에 의하면 1992년까지의 랜디 존슨은 가장 높을 때가 1991년 1.1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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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1990년노히트노런을 기록했긴 했지만, 그저 운이 좋아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한명의 투수 정도로 생각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운 좋게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고 해도, 흐지부지 사라지는 투수들이 많았고, 그가 보여주는 시즌 기록이 그를 돋보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미터 8센티라는 장신에서 뿜어져내려오는 강속구와 슬라이더는 평범했던 탈삼진 능력을 1991년을 기점으로 9이닝당 10개 이상으로 크게 치솟아 오르게 했고 1992년에는 241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커리어 첫 탈삼진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랜디 존슨의 가장 큰 문제불안한 제구력에 의한 볼넷 허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00개를 훌쩍 뛰어넘는 볼넷 갯수로 3년 연속 볼넷왕이라는 불명예를 차지할 정도로 제구력이 좋지 않던 랜디 존슨은 또 한명의 MLB 레전드, 놀란 라이언(Nolan Ryan)을 만난 이후로 그 이듬해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레전드로써의 서막을 시작하게 된다.






1993년 3년 연속 볼넷왕이라는 불명예를 씻고, 탈삼진 308개를 기록하며 개인 커리어 첫 300탈삼진을 달성하게 된다. 이를 통해 세상에 그의 이름을 제대로 각인 시키게 되고, 잭 맥도웰에 이어 사이영상 투표 2위에 오르는 성과를 내게 된다. 이런 깜짝 활약을 통해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4년 2025만달러에 재계약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그의 나이 29살 (한국 나이 31살) 다른 선수라면 기량의 정점을 맞이하는 시점, 그는 이제서야 빛나는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커리어를 쌓아가며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했을 뿐더러 1995년에는 18승 2패 평균자책점 2.48 (리그 1위) 탈삼진 294개 (리그 1위), 역대 7위에 해당하는 승률인 0.900 (리그 1위)을 기록하며 자신과 구단 역사상 첫 사이영상을 거머쥐었다. 이는 그의 나이 31살 (한국 나이 33살)에 이룩한 쾌거였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선수들은 30대 중반부터 기량이 급속도로 떨어지기에 그의 빛나는 커리어도 조만간 하락세를 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맞이한 1996년 추간 연골과 등의 부상으로 랜디 존슨은 그 해 5승에 그쳤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의 부상과 더불어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1997년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랜디 존슨은 화려하게 부활했고, 개인과 구단 역사상 첫 20승을 따내며 시애틀 매리너스의 2연속 지구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이 된다. 개인적으로도 2000 탈삼진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는 그에게 사이영상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그 해의 사이영상은 탈삼진 1개 차이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로켓맨' 로저 클레맨스(Roger Clemens) (21승 7패 평균자책점 2.05 292 탈삼진)에게 돌아갔다. 이 때 랜디 존슨의 나이는 33살(한국 나이 35살)이였다.





그리고 맞이한 1998 시즌. 계약 마지막 해 초반 랜디 존슨은 부진한 성적을 내며 구단과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에 시애틀 매리너스는 랜디 존슨의 노쇠화를 걱정했고, 그의 부진과 다음 시즌 FA를 통해 유망주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렇게 계약 마지막해, 시애틀 매리너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트레이드를 성사시킨다. 하지만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옮겨간 이후 11경기에서 10승 1패 평균자책점 1.28을 마크하여 팀의 후반기 지구 우승 레이스에 크게 이바지한다. 뿐만 아니라 시즌 329 탈삼진을 달성하며 개인 탈삼진 최고 기록을 세운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탈삼진 능력은 최고였다. 9이닝당 10 탈삼진이였던 그의 탈삼진율은 1995년 사이영상을 기준으로 9이닝당 12 탈삼진에서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매 이닝을 삼진 1개씩을 잡고, 그 중에서 3경기는 3명의 타자중 2명을 삼진으로 잡는다는 말도 안되는 비율인 것이다.





그렇게 그는 1999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구단 창단 1년차였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메이저리그 첫 시즌 하위권의 성적을 기록하고, 팀의 인기와 성적을 동시에 높여줄 슈퍼 스타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침 FA 시장에 나온 랜디 존슨을 당시 투수 최고액인 4년 5300만 달러를 안겨주며 계약하게 된다. 아무리 그동안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한들 노장 투수에게 투수 최고액을 안겨주며 계약하는 애리조나의 모습에 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할 당시 랜디 존슨의 나이는 언제 노쇠화를 보일 지 모르는 35세(한국 나이 37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랜디 존슨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구단 개인적으로도 서로 이득이 되는 엄청난 계약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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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와의 첫 계약 4년간 4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2001년에는 커트 실링(Curt Schilling)과 더불어 MLB 역사상 최강의 원투펀치라고 불리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창단 4년만의 우승을 이끈다. 이 해에 취뤘던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월드시리즈 명경기 중 하나로 손 꼽히고 있으며, 특히 7차전의 9회말 기적의 끝내기 우승은 여전히 애리조나 팬들에게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무려 37살(한국나이 39살)이였다. 남들은 30대 초반에 찾아오는 전성기가 40대에 이르러서야 찾아 온 것이다.  랜디 존슨의 강속구에 날아가던 비둘기가 맞고 즉사한 것으로 유명한 '비둘기 폭파사건'도 2001년에 일어난 해프닝이였으니, 그의 강속구가 얼마나 대단했는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다음해인 2002년 그의 나이 38살(한국나이 40살), 24승 5패 평균자책점 2.32 334 탈삼진을 기록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게 되면서 마지막 사이영상을 수상하게 된다. 특히나 탈삼진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연속 300탈삼진을 기록하는 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하면 현재 지구 최강의 투수라고 불리는 커쇼조차 지난 시즌 301개의 탈삼진으로 힘겹게 300 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런 300탈삼진을 그의 커리어 통산 6번과 5년 연속 달성을 했으니 얼마나 엄청난 탈삼진 폭격기였는지 감이 오는가. 게다가 이 탈삼진 갯수가 겨우(?) 300대 초반이 아니라 거의 중후반(최고 기록 2001년 372 탈삼진)이였으니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넘사벽 투수였다.





그 이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재계약을 맺으며 리그를 지배하는 레전드 투수로 군림했으며, 특히 2004년 5월 1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면서 메이저리그 통산 17번째 퍼펙트 게임5번째 양대리그 노히트노런, 최고령 퍼펙트 게임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그 후 2005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뉴욕 양키스와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랜디 존슨을 뉴욕 양키스로 보내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1세(한국 나이 43세)였지만, 여전한 기량으로 2005년과 2006년 각각 17승씩을 추가하며 메이저리그 통산 300승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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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에서의 2년 이후 다시 애리조나로 돌아오게된 랜디 존슨은 2009년 FA 자격을 얻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1년 계약을 맺게된다. 이 것은 통산 295승을 기록하며 통산 300승까지 5승이 남은 랜디 존슨의 의지가 크게 반영된 것이었다. 결국 2009년 6월 4일 워싱턴 네셔널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1실점을 기록, 통산 300승을 달성하게 되고 그 시즌을 끝으로 2010년 1월 6일 정들었던 마운드를 떠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한국나이 47세)였으니 실로 엄청난 투지와 역량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적는 것만으로도 스크롤이 한참 내려갈만큼 긴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요 기록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이상 5회 : 1995, 1999 ~ 2002 (4년 연속, 공동 1위)

퍼펙트 게임 1회 : 2004년 5월 18일

노히트 노런 1회 : 1990년 6월 2일

월드시리즈 MVP 1회 : 2001

메이저 리그 올스타 10회 : 1990, 1993 ~ 1995 (3년 연속), 1997, 1999 ~ 2002 (4년 연속), 2004

트리플크라운 1회 : 2002

다승왕 1회 : 2002

평균자책점 1위 4회 : 1995, 1999, 2001, 2002

탈삼진 1위 9회 : 1992 ~ 1995 (4년 연속), 1999 ~ 2002 (4년 연속), 2004

300 탈삼진+ 6회 : 1993, 1999 ~ 2002 (5년 연속, 역대 1위)

K9 10.0+ 16회 : 1991 ~ 2002 (14년 연속), 2004, 2007

통산 303승 (역대 22위 데드볼 시대 투수 제외 10위) 평균자책점 3.29 4135.1이닝

통산 4875 탈삼진 (역대 2위, 좌완 역대 1위) K9 10.6 (역대 1위)

단일 시즌 K9 13.4 (역대 1위), 이외에 역대 5위~ 9위 보유

최초이자 마지막 무사사구 20 탈삼진 : 2001년 5월 9일 (비공식)

통산 WAR 104.3 (투수 역대 9위, 데드볼 시대 투수 제외 4위)


(그 외의 기록은 댓글로 제보해주세요.)




그는 2015년 1월 7일 93.7%의 지지율로 명예에 전당에 입성한다. 명예의 전당에서 그가 쓰고 들어간 모자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애리조나 구단 세번째로 영구결번(51번)을 부여받게 되었으니 그의 야구인생의 정점을 찍은 날이 아닐까 싶다. 32세까지 고작(?) 104승이였지만 그 이후 6년간 120승을 더 쌓아올린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투수 랜디 존슨. 게다가 약물의 시대를 보냈던 전성기 시절을 고려하면 그의 기록은 더욱더 엄청나게 느껴진다. 이런 전설급 대투수의 투구를 보고 자란 게 정말 자랑스럽다. 지금도 클레이튼 커쇼가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는 데, 언제나 전설을 보는 것은 즐겁다.






P.S 중간중간에 보시는 분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지속적으로 수정할 예정입니다. 계속 재미있게 봐주세요.


자료 출처 : 베이스볼 레퍼런스 (Baseball Reference), 팬그래프스닷컴 (Fangraphs.com)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Gettyimages)



  1. 1 2016.07.19 12:32

    좋은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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